[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부인 홍라희씨, 이재용(현 삼성전자 부회장)·이부진(현 호텔신라 사장)이 2010년 12월1일 오후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에 들어서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현행법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법령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고 복잡하면서도 여전히 변칙 증여를 통한 증여세 회피를 대부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울대 법학연구소가 2003년 발표한 ‘상속세 및 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도입 방안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상속·증여세법은 이후에도 계속 수정돼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암호와도 같은 수준입니다. 새삼 상속·증여세법을 꺼낸 이유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때문입니다. 예산과 세법을 주로 다루는 기획재정부를 출입하는 제게는 국내 최대 부호이자 최대 기업 삼성전자를 경영한 이 회장의 재산 상속 역시 큰 관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속을 살피다 과거 삼성 총수 일가의 편법·변칙 증여 역사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상속·증여세법이 복잡한 근원에는 재벌들이 막대한 부를 자식에게 편법으로 넘겼고, 정부는 ‘사후약방문’으로 구멍을 메워온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 역사에 삼성 총수 일가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례 가운데 일부만 간추려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비상장 주식과 전환사채(CB)를 이용한 편법 증여를 꼽을 수 있습니다. 1994~95년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서 60억여원을 증여받은 뒤 16억원의 증여세를 내고 남은 현금으로 비상장 주식을 샀습니다. 1995년 비상장사인 에스원 주식 12만1800주를 23억원에,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47만주를 19억원에 샀습니다. 이듬해 두 회사는 상장했고, 주가는 껑충 뛰었습니다. 이어 이 부회장은 두 회사 주식을 팔아 각각 357억원, 230억원의 차익을 거뒀습니다. 1996년에는 제일기획의 사모전환사채 18억원어치를 주당 1만원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사들였습니다. 2년 뒤인 1998년 초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꾼 뒤 상장하자 내다팔아 130억원의 차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제일기획 주가는 상장 후 13일 연속 상한가를 달리는 등 고공행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회장이 세 회사의 주식을 팔아 거둔 수익만 700억원이 넘습니다. 종잣돈 40억원이 3년 만에 20배 가까이 커졌습니다. 반면 세금은 주식 거래세(0.3%), 3억원도 채 못 미치는 금액뿐이었습니다. 이 같은 변칙 증여에 정부도 법 개정에 나섰습니다. 1996년 12월 상속세법을 상속·증여세법으로 전면 개정해 과세 대상인 증여세를 부과하는 간접증여 범위를 대폭 넓혔습니다. 이 부회장이 썼던 전환사채를 통한 간접증여도 과세 조문에 추가했습니다. 당시 참여연대는 “버스는 이미 떠난 뒤”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정된 상속·증여세법은 특수관계인으로부터 취득한 경우만 증여세 부과 대상에 추가해, 법인이 발행한 전환사채를 인수하는 경우는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로부터 1997년 액면 이자율 7%인 사모전환사채 450억원어치를 인수했습니다. 전환사채 가격은 5만원으로, 당시 삼성전자 주가(5만6700원)뿐만 아니라 같은 해 해외에서 발행한 전환사채(전환가격 12만3635원·액면이자율 0%)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입니다. 싼값에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도 모자라 이자까지 챙긴 셈입니다. 2001년에야 법인이 발행한 전환사채를 인수하는 경우도 증여로 보는 조문이 추가됩니다. 그만큼 상속·증여세법은 또 난잡해졌습니다. 이후 참여정부 시절 ‘증여세 포괄주의’를 도입했습니다. 법률에 명확히 정해진 유형이 아니더라도 ‘부의 무상 이전’이 있는 경우 적극적으로 과세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법원이 조세법률주의를 강조하며 법령에 명확하게 나타난 경우가 아니면 편법·변칙 증여임에도 과세하지 않던 사정을 반영한 것입니다. 2003년 말 증여를 포괄적 개념으로 정의하고, 부가 무상 이전한 경우 증여에 해당하고 이에 대한 과세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증여세 포괄주의 도입에도 법정에서 조세법률주의와 각을 세워야 했고, 포괄주의가 무릎을 꿇으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법 개정이 이어져 암호문 수준의 상속·증여세법에 이르고 있습니다. 상속·증여세법 개정의 역사는 삼성 총수 일가의 잘못된 부의 이전 방식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사망 이후 일각에서 주장하는 ‘상속세 폐지’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도 함께 드러냅니다. 증여세는 상속세와 함께 짝을 이룹니다. 상속세만 있다면 생전에 부를 넘겨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편법으로 막대한 부가 넘어갔는데도, 상속은 아예 세금 한푼 걷지 말고 그 소득에 전혀 기여한 바 없는 이에게 막대한 부를 넘겨주자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가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한 헌법(119조2항)과도 배치됩니다. 적정한 소득의 분배는 물론 부의 영원한 세습과 집중을 완화해 경제적 균등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소득세와 함께 상속세, 증여세도 필수 구성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정훈 경제부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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