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계순저축률 11.9%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아
지난해 말 고소득층 가구 흑자율 45.7% 역대 최대
고소득층 여유자금 소비보다 자산 투자 쏠릴 가능성
미국도 부유층 저축 증가에 따른 불평등 문제 심각
대기업과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는 40대 맞벌이 이수진(가명)씨 부부. 코로나19 발생 이후인 지난 1년 반 이들의 가계부를 살펴보면, 재택근무가 많아졌지만 월 소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평소 좋아했던 여행과 외식, 쇼핑 등의 지출은 아무래도 줄었다. 애초 부부는 지출을 못 해 생긴 여윳돈으로 차를 바꿀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들은 분양받은 아파트 대출 상환과 추가 부동산 투자 등을 위해 최대한 돈을 아껴두기로 결정했다. 이씨는 “대출 규제 강화에 자산 시장 불확실성도 커지는 것 같아 투자 자금을 확보해 놓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씨 사례처럼 코로나19 영향으로 여유 있는 가계의 지출이 줄면서 ‘가계 저축률’이 21년만에 최대치로 올라갔다. 문제는 이렇게 늘어난 저축이 자칫 가계 자산격차를 확대하고, 소득→소비→생산으로 이어지는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깨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 최근 저축의 상당 부분은 고소득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 말 부유층 가계는 소득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었는데, 방역 조치 등으로 지출이 줄면서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만약 이들의 여유 자금이 코로나19 확산이 잦아들어도 사회에 유통되지 않고 누적되며, 오히려 자산 투자로만 이어진다면 불평등 강화의 불씨가 된다.
■ 고소득 가구 흑자 역대 최대 23일 한국은행의 ‘2020년 국민계정(잠정)’을 보면, 지난해 가계순저축률(소득 대비 저축 비중)은 11.9%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13.2%) 이후 21년 만에 가장 높았다. 국가 통계에서 ‘저축’은 소득에서 세금과 각종 보험금 및 이자 지급, 여기에 물건과 서비스 구입 등의 소비를 한 후 남은 돈을 뜻한다. 가계는 해당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거나 은행 예금, 대출 상환, 주식 및 부동산 투자 등에 쓸 수 있다. 쉽게 말해 여유 자금이라고 보면 된다. 저축률을 끌어올린 원인은 코로나19다. 작년 한 해 가계는 방역 조처로 지출에 제약이 생기면서 소득에서 재화 및 서비스 소비를 뺀 ‘저축 비중’이 과거보다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코로나19에도 소득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고소득층에서 저축이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은의 가계순저축률은 가계 비중을 공표하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개념을 집계하는 통계청 가계동향조사를 보면, 지난해 4분기 소득 상위 20%(5분위) 가구의 ‘흑자율’은 45.7%였다. 이는 비교 가능한 통계가 시작된 2006년 이후 최고치다. 흑자액은 소득에서 지출을 제외한 것으로 저축과 유사한 개념이다.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948만원이었다. 세금 및 소비 지출을 다 하고 남은 여윳돈(흑자액)은 346만원에 달했다. 같은 시기 소득 하위 20%(1분위)인 저소득층 월평균 소득이 98만원, 흑자액이 -31만원, 흑자율이 -38.5%인 것과 대조적이다. 코로나19는 다른 경제 위기보다 경제 충격이 훨씬 차별적이다. 충격이 큰 곳(자영업·서비스업 등)과 덜한 곳(일반 업종), 수혜 업종(비대면 사업 등)의 차이가 명확하면서 업종별 월소득 양극화가 극심했다. 지난해 저소득층(1분위)의 근로소득은 전년 대비 11.6%나 줄었지만, 고소득층(5분위)은 1년 전과 차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소득은 큰 변화가 없는데, 비자발적으로 지출이 감소한 고소득층에서 주로 저축이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은도 지난 4월 ‘이슈노트’ 보고서에서 “전체 가계 저축이 늘어난 것에는 고소득층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저축 굳어질 경우 불평등 강화 고소득층의 여유 자금(저축)은 방역 조처가 완화될수록 보복소비 등으로 시장에 다시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2분기 소득 5분위 가구의 흑자율은 38.6%로 지난해보다 다소 줄었다. 고소득층의 저축이 재화 및 서비스 소비로 시장에 풀릴 경우 ‘돈’이 돌면서 소득 재분배, 경제 선순환 등에 도움을 준다. 문제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늘어난 저축이 굳어지는 경우다. 고소득층이 쌓인 여유 자금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자산 투자에만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은은 지난해 11월 논고에서 “국내 가계저축률은 외환위기(1998년), 카드사태(2003년), 금융위기(2008년) 등을 겪으며 일시적으로 크게 상승했다”며 “1990~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저축률이 다시 하락했지만, 금융위기 이후부터는 불확실성 증대에 대응하는 예비적 저축이 늘면서 기조적으로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경제 주체들 사이에 위기 때 경기 불확실성, 자산시장 변동, 부채 증가 등을 경험하면서 여유 자금을 확보하려는 보수적 인식이 서서히 강해진 것이다. 심지어 이번 코로나19는 자산 시장 과열 문제까지 겹쳐 소득을 소비보다 투자에 쓰려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하다. 대출 상환 자금과 투자 재원으로 쓰기 위해 소비를 줄여 여윳돈을 확보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여유 자금이 시장에 돌지 않고 자산 증식의 재원이 되면 자산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다. 저축으로 인한 불평등은 이미 해외도 심각한 상황이다. 미국은 각종 경제 위기를 겪으며 지난 20년간 개인저축률이 꾸준히 올라 7∼8%대를 보였는데, 코로나19로 지난해 33.6%까지 치솟았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지난달 31일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금리는 낮아진다’는 기사에서 불평등의 원인으로 저축을 꼽는 논문을 소개하면서 “부자들의 현금이 국내외 생산적인 투자로 전환되지 않고 있으며, 미국 부자의 저축은 (경제 선순환을 막아) 정부와 저소득층의 부채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고소득층 저축은 기준금리 수준을 낮추는 ‘저금리 불평등’ 악순환도 불러온다. 저축 증가가 금리의 적정 수준을 결정하는 자연이자율 하락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은은 논고에서 “높아진 가계저축률이 고착화되면 저성장·저물가·저금리가 심화할 수 있다”고 짚었다. 김진일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코로나19 이후 대면과 비대면, 소상공인과 중견·대기업 등 업종 간 소득 불평등 격차가 커지고, 저축이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슬기 기자
sg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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