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민 강력 반발 "과잉 규제"
눈으로 신선도 확인 당근·오이
수확 빠르다고 더 신선한것 아냐
"고깃배 일주일간 바다 나가는데
날짜별로 분류? 선박 개조해야"
지난해 5월 식품 등의 표시기준 고시를 고쳐 ‘관능(시각·후각 등)으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포장한 것은 제조연월일(포장일 또는 생산연도) 표시를 생략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 대상을 ‘직거래를 통해 유통되는 농·임·수산물’로 슬그머니 제한한 것이다. 업계에선 전체 농수산물의 직거래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으로 계산하고 있다. 표시해야 하는 내용 또한 ‘생산연월일 또는 생산연도’로 바뀌었다. 생선 잡은 날을 기재하고 배추 오이 상추 등 농산물 수확일도 일일이 표기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크기나 신선도 등 상품성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고 유통해오던 농어민과 중간 유통법인, 소매채널은 발칵 뒤집혔다. 식약처가 농수산물 유통 체계 전반을 뒤흔드는 대형 규제를 현장과 협의도 없이 슬쩍 시행한다는 것이다. 식약처는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협의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 수산물 유통 관계자는 “살아 움직이는 고등어 하나하나에 낙인을 새길 수는 없으니 낚싯배에서부터 잡은 날짜를 분류해 담고 포장도 따로 해야 한다”며 “크기나 신선도가 아니라 날짜로 구분해 팔면 상품가치가 뒤죽박죽돼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농업계도 비상이다. 농산물 유통 기준이 수확날짜로 바뀔 수밖에 없어서다. 가구당 인구가 2.2명에 불과한 농가에서 일일이 날짜별 분류와 포장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유통법인에서 수확일자가 섞인 농산물을 임의로 구분할 수도 없다. 한 농업법인 관계자는 “오늘 수확한 상추여도 어제 비가 왔다면 이틀 전에 수확한 상추보다 신선도가 떨어진다”며 “농산물 특성을 무시한 채 식약처가 가공품의 잣대로 생산연월일 규제를 강제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농어민·유통법인과 농수산물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소매 마트 등은 “지키기도 어렵고 효용도 없는 과잉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강용 한국농식품법인연합회장은 “식약처에 항의하니 ‘그럼 생산연월일이 말고 생산연도를 표기하라’는 속편한 소리를 하는데 1주일이면 상하는 농산물에 생산연도 표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그렇지 않아도 초신선 경쟁을 하는 농산물에 공장에서 찍어낸 가공식품 규제를 들이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식약처 말대로 생산연도를 표기하더라도 12월 31일과 1월 1일 포장은 따로 해야 하는 촌극이 발생하게 된다. 월동 채소나 일부 과일처럼 해를 넘겨도 상품성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경우 전년도 포장된 것은 재고로 인식돼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식약처는 소비자 알 권리와 안전관리를 고시 변경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저장 기간이 짧고 현재도 신선도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농수산물에 효용 없는 과잉규제를 적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식약처 관계자는 “냉동식품 규제를 논의하다가 안전관리 측면에서 전체 자연산물에 생산일자를 표기하도록 했다”면서도 “앞으로 논의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겠다”고 설명했다.
식약처가 주무부처인 농식품부를 ‘패싱’하고 농어민의 생계와 직결된 농수산물 표시 기준 변경을 추진한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농업법인연합회 관계자는 “최근 대형마트로부터 ‘이런 규제가 내년부터 시행된다는데 협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길 듣고 고시 변경을 알게 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소비 단계의 식품을 총괄하는 식약처가 다룰 수 있는 부분”이라면서도 “생산 단계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농산물 생산자의 부담에 대해 (식약처에) 설명하겠다”고 해명했다.
박한신/강진규 기자 p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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