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산업 1기업시대
자동차 현대차·기아, 휴대폰 삼성전자, 항공 대한항공만 생존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대표기업 살려야 韓산업 명맥 유지"

14일 경제계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주요 산업 분야에서 국내 시장의 경쟁 체제가 붕괴하고 있다. 스마트폰산업에서는 LG전자가 사업 포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삼성전자 한 곳만 남게 됐다. 30여 년을 이어 온 항공업계의 ‘양강체제’도 무너졌다. 대한항공은 다음달 유상증자를 통해 아시아나항공 인수와 통합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국내 해운업계는 이미 HMM(옛 현대상선) 한 곳으로 통합됐다. 자동차산업에선 사실상 현대차·기아만 남았다. 건설기계산업도 현대중공업그룹의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완료로 국내 기업은 한 곳으로 통합됐다.
살아남은 기업이 최종 승자가 된 것은 아니다. 국내 1등이 된 ‘국가대표급’ 기업들은 글로벌 선도기업과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할 처지다. 삼성전자가 애플과의 싸움에서 진다면, 현대자동차가 미래차 경쟁에서 도태된다면 국내 산업 생태계 전체가 사라질 위험도 커졌다.
해외에선 대표기업의 시장 퇴출로 산업 기반이 무너진 사례가 흔하다. 자동차산업이 태동한 영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경쟁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자국 자동차 브랜드조차 없는 신세가 됐다. 미래차 분야에서 기존 자동차업체 중 GM과 폭스바겐, 도요타, 현대차그룹 네 곳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때 세계 휴대폰산업을 호령하던 핀란드는 노키아 몰락 이후 스마트폰 시장에 얼씬도 못 하게 됐다. 19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은 엘피다 도시바 파나소닉 등이 줄줄이 시장 경쟁에서 밀리며 반도체 산업 붕괴를 겪었다.
전문가들은 산업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국내 시장 중심의 ‘시대착오적’ 판단과 부실기업 지원이라는 임기응변식 대응으로는 제조업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종 산업 간 합종연횡과 글로벌 승자독식이 뚜렷한 산업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이라며 “한국 대기업들이 과감하게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車산업 '중견3사' 판매량…사상 처음 수입차에 추월당해
수년 전까지 국내외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기업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국내 2위 항공업체 아시아나항공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10대 해운사 중 하나였던 한진해운은 이미 문을 닫았다. 두산인프라코어와 대우조선해양은 모두 현대중공업그룹에 매각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항공 해운 건설기계 조선 등 대부분의 산업이 ‘1기업 체제’로 전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없었더라도 ‘1산업 1기업 체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속도의 차이일 뿐 각 산업의 2~3위 기업은 더 이상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게 이유다. 글로벌 시장이 빠르게 통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개별 국가의 시장마다 2~3개 기업이 존재했지만, 이제 전 세계 시장을 놓고 4~5개 글로벌 기업이 다투는 형국이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국내에서만 어느 정도 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이제 한국에서 1등을 하더라도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며 “세계 1위 기업과 겨룰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LG전자 스마트폰은 국내 1위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글로벌 1위 애플과도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LG전자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전성기 대비 30%에서 10% 수준으로, 글로벌 점유율은 10%에서 1%로 떨어졌다.
자동차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국내 시장 경쟁상대는 더 이상 한국GM, 르노삼성자동차, 쌍용자동차 등 ‘중견 3사’가 아니라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다. 지난해 중견 3사의 국내 판매량은 26만6783대로 수입차(27만4859대)에 사상 처음으로 뒤졌다. 4년 전인 2016년만 해도 중견 3사는 수입차의 두 배를 팔았다. 현대차·기아와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를 판매해 ‘대체재’ 역할을 했지만 지난해 판매량은 현대차·기아의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계 1~3위인 한국 조선업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쟁사도 중국 조선사들이다. 중국 업체들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 조선사들이 엄두도 못 낼 가격을 제시하고, 중국 정부는 이들을 위해 대규모 금융지원을 제공한다.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도 중국 업체의 견제를 떨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때 국내 양대 해운사였던 한진해운은 중국 해운사와의 경쟁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각 산업의 ‘본질’이 바뀌면서 1산업 1기업으로 전환이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애플은 단순히 스마트폰을 잘 만들어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다. 오히려 소프트웨어를 무기로 내세운 기업이다. 또 방대한 생태계를 구축해 이용자를 묶어두고 있다. ‘스마트폰-태블릿-스마트워치-PC’ 등 서로 밀접하게 얽힌 하드웨어 생태계와 수많은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중소형 경쟁자는 이를 만들어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자동차도 ‘움직이는 모바일 기기’로 바뀌어 가고 있다. 단순히 차체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소프트웨어, 커넥티비티(차량 내외부를 무선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기술), 다른 모빌리티와 연결성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
기존에 없던 경쟁자가 등장할 가능성도 크다.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폭스바겐, 도요타 등 해외 자동차업체뿐만 아니라 테슬라로 대표되는 전기차 제조사와 맞붙어야 한다. 몇 년 뒤에는 애플이 가장 큰 경쟁자가 될지도 모른다. 한 10대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산업 간 융합이 급속하게 이뤄지면서 글로벌 공룡들이 기존 영위하지 않던 업종에 뛰어드는 게 일상인 시대가 됐다”며 “앞으로 대부분의 산업이 ‘원톱 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도병욱/이승우/안재광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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