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날로 가열되고 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여러 산업 분야에서 필수적인 부품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최근에는 이런 차원을 넘어 국가안보의 필수 요소로 부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국의 기술력과 생산력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세우는 한편 다른 주요 반도체 강국들을 끌어들여 '반도체 동맹'을 형성하겠다는 움직임마저 보인다. 미국 백악관은 오는 12일 경제 참모는 물론 국가안보보좌관까지 나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최근의 반도체 품귀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수십조 원이 투입될 텍사스 오스틴 공장 증설과 관련해 미국 정부와 인센티브 등을 둘러싸고 협의 중인 삼성전자로서는 이 같은 회의 개최 자체가 큰 압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반도체 문제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에서도 주된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2일(현지시간) 개최된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 고위당국자는 전날 언론을 대상으로 한 사전 브리핑에서 반도체 공급망의 안전한 유지, 다가올 규범과 표준 논의의 협력 등을 언급하며 한미일 협의 때 반도체 문제가 의제에 오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도체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핵폭탄 못지않은 안보 이슈로 떠오른 것은 휴대전화, 컴퓨터, 서버 등 IT 제품은 물론 자동차에서부터 가전, 군사장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으로 세계 주요 자동차업체들의 생산이 대거 차질을 빚은 것을 시작으로 IT, 가전 등에까지 전방위로 확산하는 반도체 품귀 사태는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 회복을 최우선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한 바이든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00억달러 이상의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와 함께 세제 등의 혜택을 앞세워 외국 기업의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대응의 성격도 있다. 중국은 2019년 기준 15.7%에 불과했던 반도체 자급률을 오는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원천기술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을 활용해 한국을 비롯한 반도체 선진국 기술과 인력 빼돌리기, 자국 기업의 외국 기업 인수·합병 지원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은 지난달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연례 전체회의에서 공개한 '14차 5개년 계획 및 2035년까지의 장기 목표 강요' 초안의 7대 중점 과학기술 연구 항목 중 하나로 반도체를 제시하기도 했다. 미국은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중국 최대 파운드리 반도체 업체 SMIC에 대한 제재를 시행하는 등 이슈별로 대응해 왔으나 중국의 위협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해 반도체 분야에서도 '반중 동맹' 결성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함께 반도체 강국으로 분류되는 대만은 미국의 손짓에 재빨리 응답하고 있다. 대만 최대의 반도체업체 TSMC는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120억달러 규모의 공장을 세워 오는 2024년부터 5나노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이 거세질수록 한국을 비롯한 제삼의 국가들은 미중 가운데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맞게 될 우려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은 우리 기업들에 위기 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반도체 산업의 발상지이자 지금도 수많은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국력과 기술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이 작심하고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한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누려온 경쟁력의 우위는 위협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에 미국이 '반도체 반중 동맹' 가담까지 요구해올 경우 어려움은 가중될 수 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노력도 위협적이지만,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격변의 와중에서도 인재육성과 기술개발 등 기본에 충실하고 분쟁의 양쪽 당사자들로부터 모두 신뢰받을 수 있다면 반도체 패권 전쟁의 위기를 오히려 또 한 번의 도약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와 업계가 한 몸처럼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균형을 통해 실리를 얻는 지혜는 외교·안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1/04/04 11:3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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